제목은 칸다 마사노리의 <돈과 영어의 비상식적인 관계>를 패러디했습니다. ^^


교환학생 시절 살았던 아이다호는 매우 추운 곳이었다. 처음 도착했던 8월 중순에도 덥지 않았다. 10월 말부터 내린 눈은 12월부터는 매일 내렸다. 아침에 눈을 뜨면 집 앞 마당에 발목만큼 눈이 항상 쌓여 있곤 했다. 나는 눈이 오면 학교가 취소 되지 않을까, 내심 기대했지만 제설 시스템이 워낙 잘 갖춰져 등교 전까지 길가에 쌓인 눈이 깨끗이 치워졌었다.



대부분의 학교 친구들은 자기 차를 타고 등교하거나, 부모님들이 학교까지 차를 태워주었다. 그러나 나와 호스트 동생 폴은 비가 오던 눈이 오던 걸어서 등교했었다. 그 이유인 즉 아저씨는 병원에 출근해야 하고, 아주머니는 아침에 일찍 못 일어나셨기 때문이다. 어쨌든 친아들인 호스트 동생도 차를 안 태워주니, 나도 딱히 태워달라고 말하기가 그랬다. 날씨가 덜 추울 때는 그래도 학교까지 걸어가는 게 별일 아닌데, 눈보라가 치는 날이면 정말이지 얼굴이 얼음이 되는 느낌이었다.


그 길고 추운 겨울, 내가 미국 생활을 버티게 해 준 건 온천이었다. 내가 살던 동네 근처에 온천 하나가 있었다. 목욕탕처럼 큰 탕에 사람들이 수용복 차림으로 앉아 온천을 즐겼다. 나는 자주 가고 싶었으나, 호스트 가족 중 나처럼 온천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 자주 가지는 못 했다. 그래도 내가 아저씨를 보거나, 친구들을 보면 하도 '온천, 온천' 노래를 불러 가끔 차를 얻어타고 온천으로 향했다. 


농구부 tryout으로 몸이 썩은 시금치로 변했던 그 주말에도 나는 폴의 형수인 앤젤라 언니를 꼬셔 온천으로 갔다. (미국 고등학교 농구팀 테스트를 받다) 기온이 영하로 떨어진 밤, 별들이 총총 떠 있는 밤하늘 아래,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온천에 쏙 들어가니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었다. 18살 소녀 감성이 뭐 이래 싶겠지만, 18년 목욕인생을 걸어 온 나에게는 온천이야 말로 천국이었다. 

땀을 뻘뻘 흘리며 몸을 지지고 있는데,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.


“덥지 않니? 꽤 오래 있던데.

“덥다니요. 정말 좋은데요." 

“어디서 왔니? 

"소다 스프링스요." 

"아니,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?" 

"아. 한국에서 왔어요." 


40대인 아저씨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. 그렇게 나는 한국에서 온 교환학생이며, 고등학교 2학년이고, 이제 교환학생 프로그램을 절반 마쳐 간다는 등 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. 주위에서 몸을 지지고 있던 한, 두사람이 우리의 대화에 관심을 보였고 그렇게 그룹 수다를 떨게 되었다. 


그리고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어 작별 인사를 하니, 처음 대화를 시작했던 아저씨가 나에게 영어를 참 잘 한다는 말을 했다. 순간 깨달았다. 내가 미국인과 그것도 낯선 사람과 이렇게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.


온천에서 영어가 터져 버린 거다.


나는 영어 잘 한다는 말 한 마디와 모르는 미국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는 감격에 그 날 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. 여전히 수업 중에는 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입도 벙긋하지 못 하는 상태였기에 영어에 대한 자신감은 더더욱 떨어져 있을 때였다. 


그렇게 안 나오던 영어가 터진거였다. 온천에서. 


그럼 정말 나는 온천에서 만난 아저씨 말대로 영어를 잘 했던 걸까? 

답은 yes와 no 둘 다 이다. 한국식, 시험용 영어로는 잘 하는 영어가 아니었다. 올바른 문법으로 네이티브 같은 발음으로 말 하는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. 그러나 서바이벌, 실제로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최소한의 영어는 된 것 같았다. 그렇기에 그런 점에선 또 영어를 잘 하는 거라고 볼 수 있었다. 


시간이 흘러 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니고, 살아보고 하니 영어는 잘 하려 할수록 빡쳐서 잘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. 일단 내게 필요한 영어를 조금씩, 매일, 꾸준히 습득하는 게 중요하다. 그러나 교환학생 시절에는 10개월 만에 영어를 어떻게든 마스터 해야 한다, 또는 어느 수준까지 끌어 올려야 한다는 강박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다. 


<댓글과 공감은 저에게 큰 힘이 된답니다~ㅠㅠ>



  1. Favicon of http://fantasystorage.tistory.com BlogIcon 모자장인 2015.09.10 01:27 신고

    표현이 정말 재밌어요ㅋㅋㅋ '썩은 시금치'에서 빵터졌네요. 언어도 그렇고, 공부도 그렇고 잘하려는 욕심만 많을 때 오히려 잘 안되는 거 같아요-

    • Favicon of http://adultstudent.tistory.com BlogIcon 유학생 슈스코 2015.09.12 23:00 신고

      맞아요.
      외국애들이 한국말 하는 거 보면
      참 잘 한다~ 생각이 들 때 있잖아요.
      잘 하려고 하지 않고, 그냥 하려 하니깐
      잘 하는 것 처럼 보이는 것 같아요.....^^
      썩은 시금치 ㅠㅠ ㅋㅋ

  2. Favicon of http://elliotinnewyork.tistory.com BlogIcon Elliot_in_NY 2015.09.10 04:17 신고

    제 기억엔 미국온지 한 6개월쯤 지났을 때인가 수퍼마켓에 갔다 화가 치밀어
    싸우며 영어가 되네?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
    물론 논리적인 영어를 구사하여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게 된 건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였지요. ^^

    • Favicon of http://adultstudent.tistory.com BlogIcon 유학생 슈스코 2015.09.12 23:05 신고

      저는 아직도 멀은 것 같은데...
      ㅡ.ㅡ;;
      요번에 들어가서 살면,
      더 열심히~ 배워봐야겟네요 ㅠㅠ

  3. Favicon of http://meredith.tistory.com BlogIcon Meredith 2015.09.11 23:50 신고

    저는 언제쯤 영어가 나올까요? ㅋㅋ
    지금 어학원 다니고 있는데 능숙하게 하고싶은 욕심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나봅니다.
    미국에 온지 6개월째인데 오히려 더 퇴화하고 있는 느낌이 ㅠㅠ
    저도 온천에 가야하려나 봅니다ㅋㅋ

    • Favicon of http://adultstudent.tistory.com BlogIcon 유학생 슈스코 2015.09.12 23:11 신고

      온천 한 번 다녀 오시면...
      빵...ㅋㅋ
      그냥 미국에 사실 거니깐,
      조금씩 차근차근 하신다 생각하시고
      여유롭게 배워나가시면 될 것 같아요~
      저희 시부모님댁 옆집에 한국 아주머니가 사세요.
      70년 후반에 미국인 남편이랑 결혼해서
      미국 오셨더라구요.
      남편이
      "안녕하세요" 하고 한국어로 인사하니깐
      "hello" 라고 ㅋㅋㅋ
      저희도 그런 날이 오진 않겠죠? ㅋㅋ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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